친구생각

글로벌이란 단어의 의미

하산(河山) 2011. 3. 18. 07:52

얼마 전부터 우리는 글로벌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이 단어와 더불어 지구촌이라는 생소한 표현 역시 우리 생활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세계가 이젠 더 이상 멀리 떨어지고 생소한 외국 나라라는 의미가 아닌 지구라는 한지붕 아래 동거동락하는 인류촌이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와 개념이 이번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어난 참사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이웃에 대한 각 나라와 민족들의 안타까움과 도움의 마음과 손길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배려와 도움의 현상을 보며 한국인도 이젠 더 이상 극동의 작은 반도 나라가 아닌 지구촌의 한 부분으로 이웃들의 배려와 관심의 대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때 어떤 곳에서든 이웃이 당한 괴로움과 어려운 처지를 비난하고 우스게 말로 비하하는 인간들은 꼭 있게 마련인 것이 인간 사회의 한 특성인데, 미국에서도 일본 쓰나미에 관한 비하발언이나 조롱하는 말을 했다가 낙마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몇몇 있었다. 이런 상황분석이 늦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또 배운다.

   그런데 한국의 순복음교회 조 용기 목사는 일본이 우상숭배의 죄값으로 지진과 쓰나미의 벌을 받았다는 발언을 했더라. 한국 개신교, 아니 전 세계 개신교에서 단일 교회로는 가장 많은 수의 신도수를 자랑하며 매주 걷히는 천문학적 액수의 헌금을 은연중 자랑하는 이 교회의 지도자가 이런 망발을 거침없이 해대는 바람에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멍이 들고 상처를 받았다.

   한국 개신교의 오만과 독선이 언제부턴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기세였다고 느꼈지만 이번에 조 용기 목사를 통해 보여지는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불행이라는 단어보다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심각한 상태로 알려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재림하신다면 어디엘 가실까? 여의도 순복음교회 본당? 서울 영락교회?

   내가 알고 믿는 예수께는 아마 바로 센다이 해변의 무너진 집더미를 헤치며 인명구조에 시간을 쪼갤 것 같고, 원전 인근에서 가축을 버리지 못해 그 동물들과 생사를 같이 하려는 축산업자들, 그리고 지난 밤에 추위와 구조물 공급이 여의치 않아 별세한 14명의 노인들이 안치된 병상을 방문하실 것을 믿는다. 기독교인이 구주로 믿는다는 예수의 행적이 이렇게 확실하게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의 일부 지도자들은 그들이 무슨 하나님이 된양 착각하고 너는 죄인이다 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구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간통녀를 예수 앞에 데리고 와서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리겠냐고 묻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신 신약성경의 기사와 그 기사를 통해 제시된 가르침을 기세등등한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일부 지도자들은 망각한 모양이다. 양 99마리를 울에 두고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아 심산준령을 헤메는 목자의 비유는 후대 기독교인들의 삶의 내용과 질에 대한 가르침이라 믿는다.

   에도시절 정치적인 이유와 핍박으로 기독교의 존재가 거의 말살된 일본과 일본 국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분노? 그래서 저주? 아니면 측은지심으로 인한 구원의 손길을 아직 내밀고 계시며 쓰나미로 뒤집어지고 원전사고로 방사물이 몸에 쌓이는 사람들을 당신의 몸으로 감싸고 그들을 피난시키실까?

   오늘의 한국 기독교계를 보며 나는 문득 이런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너무 분잡스럽게 행동하면 어른들이 까부는 것을 보니 아프겠다 라고 하셨는데 이런 말을 기억하느냐? 한국의 기독교계가 너무 까부는 것을 보니 언젠가 한번 큰 병치례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한국 기독교계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일까?

   슬퍼하는 자와 같이 슬퍼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기본 가르침이고, 기독교의 사랑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슬픔에 동참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손길과  따스한 품을 내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