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생각
종교인의 유혹
하산(河山)
2013. 11. 29. 16:49
기독교 경전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기사와 이에 따른 인류와, 특별히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그들의 神 야왜(여호와)의 섭리에 관하여,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밝히다 신성모독죄로 로마인의 손에 의해 처형받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들이 소개되고 있다.
신약 책은 27권으로 나눠지고, 첫 4개의 책을 기독교에서는 4복음서(四福音書)라 부르며, 예수의 탄생과 활동 그리고 죽음에 이은 부활 사건들을 다룬다. 4복음서 첫번째 책은 마태라는 제자가 저술한 것으로 성경에서는 마태복음이라 부르는데, 마태복음의 4번째 장은 예수께서 포교활동을 하기 전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면서, 금식기도가 끝난 후 사탄/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기사가 소개된다.
사탄이 예수에게 다가와 3가지의 시험/유혹을 제안하는데, 첫번째 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을 명하여 너를 다치지 않게 해줄 것이니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으며, 세번째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사탄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 유혹에서 사탄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고난의 가시밭 길을 걷지 말고 나와 동업하며 1) 경제 지도자; 2) 인기받는(포퓰리즘) 지도자, 그리고 3) 지상왕국의 건설이라는 달콤하고 그럴듯한 제안을 넌즛이 제공했다. 지도자라면 "먹어야 산다"라는 가장 기본적이며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요구사항을 반듯이 해결해야 하며,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이는 지도자가 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있다해도 활동할 수 없고, 현실문제를 다루는 현실적 지도자가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 지도자를 몽상가라 부르는 것이 인류사회의 정서이다 보니, 사탄의 유혹은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만 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길, 즉 창조주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며 가시밭 길이지만, 진리와 길과 생명을 설파하고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소개했으며, 그가 부활한 후 승천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보고 배운 것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대사명을 주고 떠났다. 그 후 2,000년동안 잡다하고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가운데서도 일부 청순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예수의 뜻은 이어져 왔고 그로 인해 인류는 복음을 접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독교의 실체이자 정체며 진정한 내용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이며 생활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각박한 삶에서 몸부림치는 인류에게 고통을 덜어주고, 다른 대안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게 해주기 위해 "종교"는 존재 해왔으며,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는 현실이 아닌 현실 넘어서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계의 극낙정토 사상일 것이며, 기독교계의 사망 후의 영생에 관한 가르침이다.
인류에게 종교단체가 몽상가의 헛소리가 아닌 실제적 존재와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지 않았다면, 인류의 삶은 현재의 상태를 결코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은 종교가 없었다면, 동물의 왕국 혹은 아프리카의 보호지역에서 일어나는 동물들의 잔혹한 생존을 위한 사투와 같은 살벌한 삶이 오늘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종교의 힘과 끈질긴 포교활동은 현재 인류사회에 그나마 이런 안정을 가져왔고, 그 안정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삶과 생활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다. 그래서 종교에 감사하고, 그 종교를 포교하고 민초들의 삶에 진리와 이에 따른 희망을 경작하며 돌봄이의 역활을 스스로 해내는 종교인들을 존경한다. 우리가 걷는 가시밭 길을 이들이 앞장서 걸어주기 때문에 뒤에서 감사하며 이들의 존재로 인해 더욱 격려받으며 전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너무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들의 안위와 안락을 위한 삶과 빗나간 초점으로 인해 순수 종교인의 삶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 속에서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며, 많은사람들을 오도해 왔고 지금도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계의 중세기를 우리는 암흑기라 부르는데, 종교계가 얼마나 인류의 역사를 흐려놓았으면 후대가 그 기간을 암흑기라 부르겠느냐?
찬란한 르네쌍스의 문화와 문명이 판을 칠 때 종교지도자들은 세속의 흐름에 편승하여 고난의 예수를 왕족과 귀족으로 둔갑시켜 놓고, 그 위세를 교묘히 활용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켰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수없이 반복되며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으며, 한국 개신교계의 혈연 후임자(목회자) 계승이라는 변태적 제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종교계, 기독교계와 불교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발언들과 행동들은 지난 수세기동안 일어났던 종교계의 "외입(오입, 외도)"이 재발된 것으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없는 정치노름이라는데 한국의 비극이 존재한다. 종교는 현실문제를 직시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넘어선 영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며 임무인데, 왜 일부 종교인들은 정치문제에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람들을 오도하는지 이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 중 가롯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열심당원 즉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독립군 소속이었다. 예수가 어린아이가 소유했던 점심용 마른 빵 5개와 마른 생선 2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12 바구니가 남았던 것과 다른 기이한 일들을 보고, 유다는 예수를 경제 대통령과 정치 대통령 그리고 전 국민의 인기를 단숨에 얻을 인기지도자로 보고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대가 예수의 "고난의 종"이라는 선포와 가르침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노예의 몸값인 은 30냥에 스승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버렸다.
천주교의 정의구현 사제단과 개신교의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행보는 가롯 유다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단체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국민들의 선출이라든지 민주 자유사상이라는 단어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들의 원하는 것에 정부나 개인이 맞지 않으면 거부하고 반대하며 값싼 말 몇개로 팔아버리는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는 DNA를 보유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님을 알면서도 왜 저럴까? 그것은 극단의 이기적 사상이 종교의 범위를 침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은 숭고한 영혼의 자유를 외면하고, 인간의 사상을 극대화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라는 껍질을 뒤집어 쓰고, 안그래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영혼에 다른 족쇄를 채우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양의 가죽을 쓴 늑대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양가죽을 쓴 이기심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아니면 다른 어떤) 욕망을 이루려는 늑대라는 말이 과한 말일까?
진리를 선포하는 곳에서 정치 이야기가 흘러 나올 때 그 장소는 예배드리는 곳이 아닌 난장판이 된다. 진리만이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정치는 그 자유를 소유한 사람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모여, 방향을 설정하고,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일부 종교인들은 진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오도하면서 그들의 야욕을 신도들에게 강요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구나!
정치꾼 종교인들이 많을 수록 사회와 민심은 흉흉해져 왔던 것이 인류역사에서 보여지는 현상이다. 바라기는 한국 사회의 안정과 민심이 몇몇 사리사욕을 쫓는 양의 가죽을 쓴 늑대 같은 종교꾼들에 의해 흐려지거나 흔들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표현장에서 나가버리는 국회의원들의 무책임한 행위 역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이며, 국민들의 세금만 축내면서, 거금의 월급을 챙기고, 교묘히 도둑질하고 있음에 화가 난다. 이 추위에 따뜻한 커피 한잔 사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액의 월급을 챙기며 일하지 않고 고급 식당에서 배불리 먹는 이들은 가난한 민초들에게 敵이며 원수가 될 것이다.
종교인들은 물질이든, 정치든, 명예욕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의 유혹 앞에서도 떳떳이, 자신의 종교인으로 피택받은 당당함과 긍지를 갖고, 유혹을 물리치는 아름다운 삶을, 연말 추위에 움추린 몸으로 종종 걸음을 내딛는 국민들에게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종교인 모든분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의 존경과 격려를 바친다.